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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9 타이페이 국립 중정 기념당 (타이완 민주 기념관)

pebblebeach 2018. 12. 8. 13:18


우리나라는 1992년 중공(현 중국)과 수교하면서 동시에 대만과는 단교를 한다.

그 후 40년 이상 대만 국민은 한국에 대하여 의리없는 국가로 매도하였고

한국인은 대만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애써 무시하였던 관계였다.

연예 오락프로지만 양국을 이해할 수 있는 프로그람 덕분에

많은 한국인이 대만을 찾는것은 참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8:30)  오늘은 타이페이 여행의 나흘째 마지막 날이다.

타이완 초대 총통인 장제스 蔣介石을 기념하기 위하여 1980년에 지어진

국립 중정 기념당 (최근 타이완 민주 기념관으로 이름을 바꿈)을 방문한다.

동쪽의 대충문 大忠門으로 들어간다.




타이완이 근현대사를 조금 이해하는것이 중정기념당을 관람하는데 도움이 된다.


1590년 포르튜칼인이 방문하여 FORMOSA ("아름다운 섬" 이란뜻)라고 불렀다.

1683년  청나라가 통치시작

1895년 청일전쟁후 일본에 할양 (시모노세끼조약)

1912년 손문이 남경에서 중화민국 건국 선포

1927년 장제스의 북벌이후 중국통일

1928년 ~ 1949년까지 대륙지배


1945년 일제 패망후 중국 국민당은 국부군을 파견하여 타이완 인수작업 실시.

1945년 ~1949년 국민당 장제스 정부와 모택동의 인민정부간의 내전.

1947년 "2.28 사건이" 발생. 국민당 정부에 의한 타이완 주민 수만명 학살.

1949년 12월 국공내전에서 패망한 장제스는 타이페이로 정부소재지를 옮김

國府遷臺라 하며 수도를 옮긴것이 아니라고 강변한다.

1970년 UN에서 타이완 축출


대충문에서 중정기념당으로 가는 길


장제스와 부인 송미령 (宋美齡, 쑹메이링)와의 가족사진.

장제스의 세번째 아내가 된  송미령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뒷 줄 남자는 전처 소생 장경국으로 장제스 사후 총통이 된다.



송미령과 장제스의 결혼사진 (1927년 9월 결혼식을 올림)

장제스 (1887년  ~ 1975년 )는 41세고 송미령은 31세다.

송미령 (1897년 ~ 2003년)은 107세에 미국에서 사망한다.



북벌할 때의 장제스 모습



1927년 장제스가 일본 고베의 아리마 온천을 방문 했을 때 사진이다.당시 41세.

有馬온천은 우리 나라 문경의 온천같이 흙색물로 내 기억에 남아있는 온천이다..



송자수 (1863 - 1918)의 세 자매, 송애령, 송경령, 송미령은 일찍

미국유학을 하였으며 웨슬리 대학을 최초로 졸업한 중국인 여성이다.

송애령(1889-1973)은 부유한 공자의 후손 공상시와 결혼,

송경령(1892-1981)은 22세에 아버지의 친구인 혁명가 손문(49세)과 결혼,

송미령은 장제스와 결혼을 하면서  당시의 최고의 권력을 잡게 된다.  

각각 돈, 조국, 권력과 결혼한 세자매로 회자된다.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산 세딸은 중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다.


(1934년 photo)


장제스의 전용차 2대가 전시되어 있다.

위의 캐딜락의 번호는 중국인이 좋아하는 888 숫자가 들어가 있다.

아래의 캐딜락은 공식적인 전용차로 방탄 유리이며 필립핀 화교가 선물한 것이다 (1955년)








1945년 7월 포츠담에서 열린 미.영, 중 정상 회담.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한국의 독립을 담은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고집불통 처칠이 장제스를 싫어하여 루즈벨트 옆에 앉았다고(?) 한다.




장제스는 국부천대로 타이완, 금문도, 마조도와 남사군도를 실효 지배한다.

1952년 장제스가 중국과 마주보고 있는 진먼다오 金門島를 순시하고

Wu Wang Zai  Ju 毋妄在莒(거) Forget Not the Days in Ju 라고 썼다.

莒는 지명인지 모르겠다. 아시는분은 댓글 달아주십시요 ㅎ



1954년  공군 군관학교  졸업식에 참석한 장제스 부처

송미령이 장제스보다 한 발 앞서 걷고 있다 ㅎㅎ



1950년 6월 한국동란 발발후 7.31 맥아더 장군이 대만을 방문한다.

미국이 대만을 방위한다는 확약을 받고 장제스가 만족한 웃음을 짓는다.



1966년 2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대만을 방문, 장제스와 환담하고 있다.

우리나라와는 단교이전에는 매우 가까운 관계였다.



장제스 총통의 집무실

마주보는 자리에 송미령이 앉는 의자가 있다.

책상 설합의 방향이 모두 송미령이 앉는 방향이다.

송미령의 파워를 실감하게 한다.



송미령은 장학량의 시안사건 때 (1936) 시안으로 달려가 담판으로 남편을 구해냈으며

중국인으로서 첫 미국 의회 연설(1943)을 한 매력적이고 당당한 여성이었다.

그렇지만 송미령은 대단히 사치하였으며 미국에서 보낸 국민당 지원금이

장제스 부처와, 송자문(송미령의 남동생) 및 공상희 집안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장제스 정부의실패와 대만인들이 일제에 대한 반감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충문으로 입장해서 대효문으로 나왔다.

忠과 孝의 문이다.



중정 기념당의 정문이다.

중앙의 민주광장의 왼편(사진)은 국립극장이고 오른편은 콘서트 홀이다

비가 뿌리기 시작하여 멀리서 사진만 찍었다.



중정 기념당은 1980년에 타이완 초대 총통 장제스를기념하기 위해 지어졌다.

(장제스는 1975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아들 장경국 총통도 1988년 사망)

우리나라는 국부 이승만 박사의 기념관은 화진포에,  박정희 대통령의 기념관은

성암동 후미진곳에 있으나 박정희 동상 건립도 반대하는 일부 인사들은 참으로 안타깝다.



중정기념당 건물은 높이 76m의 거대한 대리석 건물이다.

1949년 국부천대때 이주한 대륙의 인구 (외성인)는 14%에 불과하고

본성인(대만인)이 84% 이다. 비극적인 2.28 사건 등이 있지만  대만인은 장제스를

지금도 功勞를 인정하고  過失를 구별하여 역사를 보존하고 있다.

 


송미령 자매의 이야기의 영화 '宋家皇朝" (1997)는 미국에서 본 적이 있다

신해혁명 이듬해 중화민국이 건국된 후 부터 대만으로 철수하기까지의

약 40년의 역사를 보여준다. CD를 구해서 다시 한 번 보고 싶다.




(12:30)  타이페이 마지막 오찬은 샤브샤브 요리 전문점 TAKAO에서 먹는다.

친구들과 모임에 자주 이용하는 양제동의 일품헌과 비슷하지만

친구가 없고 엔타이 고량주가 없어인지 맛이 덜하다.

공항가는 전용버스안에서 운전기사가 대만 수베니어를 판다.

수고비로 팁을 줄 생각였으니 당연히 몇 점을 팔아주었다.

폐를 주지 않고 정당하게 소득을 챙기는 대만인의 상술이기도 하다.




타이완은 작은 섬 나라이지만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먹거리도 많지만 단체 여행이라 정해진 음식밖에 먹지 못했다.

단체투어와 개인여행의 장단점이다.


타이완 중부의 2,484m 阿里山은 일출, 운해, 숲, 석양이 아름다운

명산이라 한다. 2,190m까지 72Km를 달리는 고산열차를는 꼭 타보고 싶다.

타이완은 비가 적게 오고 무덥지 않는 11월에 관광의 적기라고 한다.

내년도 여행지 버킷리스트에 추가해야 할 것 같다.



2018년   12월  8일

여행을 다녀온지 한달 만에


영평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