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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14.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뤼순 러일 감옥옛터

pebblebeach 2015. 8. 6. 18:03

 

안중근 의사는 11월 1일 하얼빈에서 압송되어 11월 3일에 닿은 마지막 종착지 뤼순역.

 

뤼순 일본 관동법원 옛 청사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관내 주민들에게 대한 재판권을 행사하기 위해 1906년에 건축.

1910년 2월 14일  제6회 공판에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마나베 주조 재판장은

안중근 의사에 대해 사형을 언도한다. 우덕순은 징역 3년, 유동하, 조도선은 징역 1년 6개월이 언도된다.

 

 이곳에는 전람관이 설치되어 있고 안중근 의사가 재판을 받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고 있다.

다롄 외국어대학의 김월배 교수는 안 의사는 하얼빈의거 이후 144일간의 공판투쟁을 벌리지만

안 의사는 공정한 재판을 받지 못하며 일본 행정부는 사법부에 압력을 넣어 게획된 사법살인을 한다.

 

안중근 의사 공판당시의 재판관원들의 모습과

찰스 모리머 기자가 쓴 공판 관람기 영어기사.

 

대한매일신보 1910년 2월 26일자에는 피고석의 안중근은 빙그레 웃으며

이보다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하였다고 보도 하였다.

 

관동도독부의 지방법원에서는 1심 이전에 예심을 거치도록 되어있으나

안중근 의사의 경우 중대한 사건임에도 예심없이 곧바로 1심 공판에 부쳐졌다.

초기의 신문과는 달리 12월 20일 제8회 신문부터 미조부치 검찰관의 태도가 강압적으로 돌변한다.

 

 1910년  3월  10일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 특별 면회실에서 홍석구(빌렘)신부,

정근, 공근 두 동생과의 마지막 면회를 하고 있다.

 

 

전시실에는 안 의사 등이 감옥에서 재판장으로 오갈 때 탄 마차가 전시되어 있고

각종 고문기구들이 진열 되어 있었다. 너무 잔인하여 사진으로, 필설로 옮기질 못할

악랄 잔인한 것들이다.  인간의 탈을 쓴 짐승들에게 고초를 당하고 돌아가신

 애국지사님들에게 숙연히 머리 숙여 그들의 명복을 빈다.

 

 

 

뤼순 러일 감옥 옛터는 현재 중국에서 제일 큰 국제적인 감옥 옛터이다

두 나라 (러.일)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 제3국 (중국)에 같은 감옥을 만든 경우도 유례가 없다.

1902년 러시아가 건축하고 러일 전쟁후 1907년 일본이 현재 규모로 확장하였다.

 

1971년 복원을 통해 전시관으로 꾸며져 일반인들에게 개방되었다.

1988년 중국 정부는 이곳을 국가중점 역사문화재로 지정하였다.

 

안 의사가 순국한 교형장 (사형집행장)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라는 표지 (아마도 다른 장소에 복원한것 같다?)

 

 

일동 모두 안중근의사가 순국한 장소에서 엄숙히 참배한다.

 

안중근은 1910년 2월 14일 사형이 언도 되었고 5일내에 항소를 할 수 있지만

2월 19일 안중근 의사는 항소를 포기한다. 이 결심에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의 말씀이 크게 작용했다.

사형이 구형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는 두 아들 정근과 공근을 여순 감옥으로 보내어 당신의 뜻을 전했다.

"옳은 일을 하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大義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일본의 아사히신문은 是母是子 - 그 어머니에 그 아들 - 라고 보도했다.

 

안중근 의사는 3월 24일 어머니, 아내, 동생 정근 공근, 사촌 명근 등에게 유서 6 통을 작성한다.

죽음을 앞두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는 냉정하면서도  의연한 모습이다. 

 

부인  김아려여사와 장남 분도(1905), 차남 준생(1907).

안의사는 장남 분도가 신부가 되기를 원했지만 분도는 12세에 사망한다.

안 의사 의거 직후 하얼빈에서 찍은 사진이다.

 

이슬과도 같은 허무한 세상을 먼저 떠나지만 훗날 천당에서 기쁘고 즐겁게 만나자면서

아내에 대한 애틋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편지다.

 

안중근의사 가문은 15명이 독립운동 공로 서훈을 받았다.

사진 오른쪽부터 아들 준생, 동생 정근, 정근의 아들 원생, 장녀 현생(1902~1960), 동생 공은의 아들 우생. 

안의사 직계는 :

아들 안준생 -  손자 안웅호(Anthony Ahn. 2013/1/31 사망) -

                      증손자 안도용 (1963생. 미국 거주. 미국이름 Tony Ahn, Jr.) 과 증손녀 Karen, Ahn 이 미국에 거주한다.

장녀 안현생은 (1953~1956 대구 효성여대 불문과 교수 역임) - 외손녀 황은주 (86. 미국 거주)가 있다.

 

안의사는 죽은 다음 하얼빈 공원 (지금의 조린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고국으로 반장하기를 유언으로 남겼다.

정근, 공근 두 동생이 유해 인도를 요구하나 거부당하고 공동묘지에 묻힌다.

정근, 공근 두 동생과 홍 신부와 마지막 면회에서 안중근 의사는 동포에게 고함을 남긴다.

 

안중근 의사를 구금했던 감방.

우리에게는 특별히 내부를 볼 수 있게 출입을 허용하였다.

 

'조선애국지사 안중근을 구금했던 감방'이라는  안내판

 

"안응칠 역사" (12월 13일 부터 기술하여 3월 15일에 탈고)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의 서문 및 전감 일부분을 저술한 감옥안의 책상과 지필묵.

 

딱딱한 나무 침대와 안중근의사의 옥중투쟁에 대한 설명이 있다.

안의사는 2월 17일 히라이시 고등법원장과 면담하고 "동양평화론"을 저술할 수있게

사형집행 일자를 늦추어 줄 것을 요구했고 히라이시는 특별히 허가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히라이시 약속과는 달리 사형 집행은 연기되지 않았고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은

서문과 전감(前鑑) 일부분만 저술하고 現狀, 伏線, 問答 부문은 미완으로 끝났다.

그러나 안 의사가 쓰고자 했던 내용을 당시 통역 소노기에게 알려줘 그 기록이 남아 있다.

 

안중근 의사는 감옥안의 책상에서 200여 폭의 붓글씨를 남겼고

유묵에는 해박한 지시과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정신이 담겨있다고 설명서에 쓰여있다.

 

1906년 ~ 1936년 사이 뤼순감옥 수감자는 연간 2만여 명에 달했고,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는

한국과 중국의 항일지사와 사상범을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온갖 악형을 가하였다.

1942~1945년 사이에 약 700명의 수감자가 처형당했다.

신채호 선생은 1928년 체포되어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다.

 

우당 이회영 선생이 옥고를 치른 감옥 (다롄에서 피체되어 고문으로 순국함)

최홍식 열사 (1909~1933), 유상근 열사 (1910~1945)도 뤼순감옥 수감중 순국 하였다.

 

다롄 외국어대 김월배교수는 안중근 의사 유해 발굴과정과 현황을 설명한다.

그리고  유해를 발굴해야하는 당위성을 역설한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제국주의 상징인 이토를 격살한 분이다.

동양 평화를 위해서 순국한 안 의사는 그가 남긴 유언에따라 반드시 고국으로 봉안되어야 한다고.

 

김교수는 안의사에 대한 일제의 특별관리로 별도 매장 했을 수 있다고 믿고있다.

아직도 일본과 중국 (북한을 의식해서)이 미공개한 자료를 찿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2008년 한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 유해발굴단'을 편성하여 뤼순 감옥 사형수 무덤이라

알려진 곳에 대대적 발굴작업을 펼쳤으나 끝내 찿지못했다. 그곳은 지금 아파트 단지로 바뀌어 있다.

 

전 뤼순 감옥 의사 '고가 쇼이치'로가 1999년 뤼순 감옥을 방문하고 참회의 기록을 남겼다.

 

 

일본 의사 고가 쇼이치가 증언한  絞刑場 (사형집행장).

벽에 걸린 사진은 교수당한 시체가 나무통에 들어가 썩어 육탈된 뼈, 해골 모습.

 

'고가'가 증언한 대로 하루에 3 명을 처형할 경우 2명은 처형장 밖에서 대기하는 방.

처형을 기다리는 사형수에게 이보다 더 무서운 공포와 잔인한 고통이 있을까?

 

교수후 목숨이 끊어지면 시체를 담는 나무통 

 

1971년에 발굴된 시체통 (그러나 엽기적인 전시다..)

여순감옥 밖 동쪽 언덕에 위치한 3 에이커 면적의 감옥 묘지에는 90미터 도랑이 다섯개가 있고

그 안에 시체통이 빽빽하게 묻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과거에는 뤼순 감옥 묘지였다. 

 

지난 2015년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05 주기 였다.

찿는다 해도 일백년이 지난 지금까지 유해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야 희박하지만

마지막 가신 흔적, 흙이라도 담아 효창공원의 가묘를 진묘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 7박 8일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세미나가 열렸다.

안중근 의사를 세계인이 존경하는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젊은 지성인  대학생들이 열띤 토론이 있었다.

 

나는 사적지 탐방 전후 3권의 책을 읽었다.

숭모회 발간 안 의사의 옥중자서전 '안응칠의 역사'

송기호 저자의 '발해를 찿아서'

박도 지음 '영웅 안중근'을 읽었으며

많은 부분을 인용하였다.

사진은 1-2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인의 사진이다

 

나는 30년 전 인하대 윤병석 교수의 대하 시리즈 '한국독립운동사

만주.노령에서의 투쟁' (1986년 6월 27일 및 7월 11일자 한국일보)에서

처조부 尹能孝 성함을 읽었고 그분이 안의사 거사자금 200원을 지원했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다.

 안중근 자서전에는 거사자금 100원을 이석산으로부터 강제 차용함과 추가로 김성백에게 50원 차용을

부탁하고 대동공보 편집인 이강에게 차용금을 갚아 달라는 편지를 안중근, 우덕순이 연명하여 보낸다.

안중근의사는 거사자금 지원자 윤능효를 보호하기 위하여 의도적인 기술이라 생각한다.

 

 

 처조부 윤능효는 1.4 후퇴당시 1953년 10월 10일에 부산에서 72세를 일기로 별세하며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으면서 국립현충원 애국지사묘에 이장 안장되었다. 

이강 선생의 아들이 늦게 이 사실을 증언하면서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2015년   7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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