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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7.9. 우스리스크와 크라스키노의 안중근 의사 발자취(2)

pebblebeach 2015. 7. 21. 20:17

 

우리는 안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을 떠나기 전

안중근의사의 탄생 전후부터 열강의 침략무대가 된 조선반도의

시대상황을 한번 더 공부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었다. 

아래 사진 6 장은 남산의 안중근의사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들이다

 

 

1876년 일본이 군사력을 동원한 강압에 의해 불평등한 강화도 조약 체결.

1879년 안중근의사 황해도 해주에서 부친 안태훈과 모친 조마리아 사이에 탄생

 

 

1882년 임오군란

  1884년 (안의사 6세)  갑신정변, 개화당 내각의 3일천하

 

 

1894년 안의사 16세때 동학 농민전쟁이 발생하며, 향반 김홍섭의 딸 김아려(17세)와 결혼.

 

 

1894년 청일전쟁 일본의 승리

 1895년 청국은 '조선에서 청국의 종주권파기'하는 강화조약 체결.

 

 

안의사 18세 1896년 아관파천과 1897년 대한제국 선포

 

 

1904년 일본은 러일전쟁 승리후 

1905년(안의사 27세) 한국은 을사늑약을 강제받아 외교권을 박탈당한다.

 

1906년 28세때 안의사는 진남포로 이주하여 삼흥학교, 돈의학교를 세우고 교육입국에 힘쓰고 있었지만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을 빌미로 일본 통감 이토 히로부미는 고종을 강제 퇴위 시키는 등

한국의 식민지화를 강력추진하자 '교육으로는 백년대계는 가능하되, 당장 망해 가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결단을 내리고 해외 망명의 길을 떠난다.  안중근의사 29세 1907년의 일이다.

 

 

 

 

 

우스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112 Km, 버스로 1시간 반 거리에 있다.

한카 湖 남쪽의 저지대에 위치하며 동해로 흘려드는 우수리강 지류에 자리한다.

우스리스크는 연해주를 중심으로 펼쳤던 독립운동의 중심적 역활을 했던 곳이다 (두산백과)

 

우수리스크 가는 길의 라즈들리노예 기차역이다.

이 기차역에서 연해주 고려인들은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리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다.

 

1937년 9월 어느 날 스탈린의 붉은 군대는 한인지도자 2,500명을 일본 스파이라는

누명을 씌우고 사살한다.그 후 9월 21일부터 두 달 동안  총 171,781명의 한인을

(블라디보스톡 역사보관서에 보관되어 있는 숫자다) 강제 이주 시킨다..

 

40일간 6,000 Km를 추위와 굶주림으로 화물칸에서 半 이상이 죽었으며

재정 러시아 시대부터 유배지로 유명했던 반 사막지대에 겨울을 나면서 또 1/5이 죽었다

나라를 잃은 불쌍한 우리 민족의 처참함에 가슴이 메인다.

 

라즈들리노예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김정일이 태어난곳을 지난다.

당시의 장교숙소인 붉은 벽돌집 2층 동쪽 첫번째 방에서 산파인 엘레나가 출산을 도왔다 한다.

당시 17세 산파는 44 Km 눈 길을 걸어 와서 산모 김정숙을 도왔다고 증언했다.

 

수이푼 (라즈돌나야)강에 잠든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를 찿는다,

이상설선생 (1870. 12.7 - 1917. 3.2)은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되었으나

실패하고 1908년 연해주로 망명하여 의병활동을 한다.

 

이상설 선생은 1908년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병사한다.

그는 죽으면서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킬코 이룩하라. 나는 그것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 혼인들 어찌 감히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 글을 모두 불태워 강물에

흘려보내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수이푼 강물에 뿌려졌다.

유허비는 2001년 10월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이 세웠다.

 

우스리스크에는 '끄라스노야로프 산성'이라는 발해의 성터가 남아있다.

이상설 선생 유허비를 지나 수이푼 강을 건너가면 강을 자연적인 해자로 삼고 있는 성이다.

 

산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 안은 허허벌판처럼 넓다.

외성의 전체 길이가 8 Km이고 외벽은 2~3중으로 되어 있으며 성벽 높이는 3~5 m 이다.

발해는 수이푼 강 유역의 초원에 많은 말을 길렀으며 성 안에도  발해의 명마가 뛰놀았을것 같다..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가 러시아 우스리스크도 영역이었다니 놀랍다.

발해는 고구려 멸망 후 30년이 지난 698년 대조영이 건국한다.

926년 거란에 망할때까지 228년간 해동성국으로 한국 역사상 가장 넓은 영역을 통치한 국가다.

 

 역사탐방팀의 교수님과 스테프진 기념 촬영 (여성경제신문 강민지 기자 촬영)

 

수이 푼 강을 끼고있는 성을 중심으로 926년 거란족과 발해군사이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고

발해군사들은 최후의 1인까지 산화한다. 이 때문에 러시아에선 이 강을 슬픈 강이라 부른다고 한다.

(숭모회의 가이드 북) 수이 푼 강이 슬픈 강이 되어버렸다 ....

온갖 야생화가 가득한 우스리스크의 발해 성터이다.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를 기념하기위해 건립한 고려인 문화센터는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이라고도 한다.

2004년 러시아 한인 이주 14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러시아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고

한국의 재정지원으로 지어진 연해주 고려인들의 중심 센터이다.

고려인 역사관은 2014년 러시아 한인 이주 150 주년 기념사업으로

사진으로 보는 고려인 이야기를 소개한다.

 

 

 

1901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상주공사 이범진과 이상설, 이범진의 아들 이위종 (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은 이준 과 함께 헤이그 밀사로 파견되었다.

이범진은 1911년 국치후 목을 매 생을 마감했으며 상트페테르부르그의 공동묘지에 추모비가 있다.

 

러시아 한인 사회의 지도자 최재형은 함경도 경흥 출신으로 자산가로 성장하여

동의회 총장, '대동공보'사장, 권업회 회장 등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재정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62년 대한민국정부에 의해 건국공로훈장이 수여 (1995년에 전달됨).

최재형의 딸 올가의 증언에 따르면 안중건의사는 거사 전 최재형 집에 머물면서 사격연습을 하였다고 했고,

하얼빈 거사후 아버지가 안중근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도 돌봐주었다고 한다.

그는 최근까지 우리에게는 잊혀진 인물로 남아 있었다.

 

안중근의사는 11명의 동지와 크라스키노에서 단지동맹을 맺고 대한독립 혈서를 쓴다

 

1917년 러시아혁명으로 전로한인회 중앙총회가 결성된다

 

1919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수립된다.

국내외를 통틀어 최초의 임시정부였다

 

1920년  신한촌에서 거행된 3.1 운동 1 주년 기념식

 

 

 

일본군은 1920년 4월 참변시 최재형선생과 3인의 의사도 체포, 처형하였다

 

그녀의 한국이름은 김애리,  1885년 2 월 우스리스크 출생, 1918년 9월 34세의 젊은 나이에 총살당한다.

 

내일 중국 도문으로 이동하면서 봉오동전투 승전지 탐방 계획이다.

 

고려인 역사관의 사진 항일 영웅 59인에 대한 개별적인 설명이 필요하지만 생략한다.

 

대동공보사의 이강 선생은 안중근의사의 하얼빈거사를 최종적으로 도우신 증인이다.

아래의 3 의사는 안중근, 우덕순, 유동하의 얼굴이다.

 

1920년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 순국할 때까지 거주하였던 최재형의 집이다.

지금은 대한민국 정부가 매입하여 '최재형 기념관' 개관을 추진하고 있다.

 

최재형 선생의 저택 근처에는 전로한족중앙총회 결성 장소 표지판이 있는 건물이 있다.

 

4월 참변 추도비.

1920년 4월 참변때 우스리스크 일대에서 희생된 러시아인과 한인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탑이다.

 

4 참변 추도비에 헌화와 묵념을 하고 우스리스크를 떠나 다시 112Km 남쪽 블라디보스톡으로 돌아간다.

우스리스크는 사실 안중근의사의 사적지는 없다.

다만 안의사가 우덕순과 함께 10월 21일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이곳에 내려 차표를 산곳이다.

 

여행 사흘째,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연해주 최남단 국경도시 크라스키노로 향한다.

1863년 한인 13가구가 두만강을 건너 정착한 '지신허' 마을 입구이다.

 

지신허 마을은 국경마을로 별도의 허가를 받아야 출입할 수 있다.

서태지가 한러수교 120돌을 맞아 기념으로 2004에 세운 '지신허 마을 옛터'라는

'한러친선우호기념비'가 세워져 있다고 하나 보지못하고 지나쳐서 아쉬웠다.

 

1909년 2월 7일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결사동지 12인은 크라스키노(엔치야 하리) 마을에서

후일 독립투쟁과 의병을 다시 일으킨다는 결의로써 단지 혈서 맹약을 행하였다..

대학생 두명이 대표로 헌화하고 모두 머리숙여 참배한다.

 

2011년에  새로 세워진 단지동맹 기념비

 

크라스키노에서 중국 훈춘과 러시아 최남단 국경 엔치야 마을로 가는 삼거리의

크라스키노 전망대에 오른다.

 

이번 연해주 사적지 답사 가이드를 해주신 조미향씨가 손수 그려 온 지도로

크라스키노에서 핫산마을과 훈춘가는 3 거리를 설명하고 있다.

핫산 마을도 특별히 군 부대에서 국경 출입 허가증을 받아야 한다.

 

전망대에서 인증 사진을 남긴다.

사진에 일직선으로 보이는 도로는 중국 훈춘으로 가는 도로이다.

크라스키노에서는 북한 나진으로 가는 철로와 도로가 지척간으로 연결된다.

 

 

블라디보스톡에서 20년 넘게 거주하고 있는 가이드 조미향씨는 블라디보스톡 홍보대사이다.

한국 역사에 잊혀져 있지만 최재형 선생의 역사적 유산과 정신에 대하여 열변을 토하였다.

2박 3일의 연해주 지역의 항일독립운동가 개개인의 역사에 대하여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기회였다.

 

안중근의사는 기차로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하여 우스리스크를 거쳐 만 하루와  반일만에

하얼빈에 도착한다. 안의사 발자취를 따르는 탐방단인 우리는 오늘 훈춘으로 중국에 입국하고

도문, 연길과 백두산, 돈화를 거쳐 하얼빈으로 간다.

 

연길에서

2015년   7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