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sia

2015.7.8.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의 안중근의사 발자취를 따라(1)

pebblebeach 2015. 7. 20. 20:40

 

1879년 9월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세 나이에, 1909년 10월 26일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동양평화론을 주창하며 조선반도 침략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하알빈역에서 격살하고

1910년 3월 26일, 32세에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의사의 국외독립운동 사적지를 탐방하는

7박 8일 코스에 참여하게 되었다.   (사)안중근의사 숭모회/기념관이 주체하는 사적지 탐방은

금년이 11회로 대학생 26명과 지도교수 등 9명으로 2015년  7월 8일 드디어 장도에 오른다.

 

사진은 블라디보스톡 공항에 착륙하기전 하늘에서 보는 블라디보스톡이다.

 

블라디보스톡은 1856년 러시아인이 발견, 1860년 부터 항구와 도시가 건설된다.

겨울철에는 항구 안이 다소 결빙하지만 러시아의 부동항으로 러시아 극동 군사기지이다,

 

블라디보스톡은 러시아 연해주의 행정중심도시로

블라디는 정복하다, 보스톡은 동쪽의 뜻으로 블라디보스톡은 '동방을 점령하다'라는 뜻이다.

바닷가에 연해있다고 연해주라고도 하며 3 면의 바다에 둘러싸인 블라디보스톡은 한자어로 海蔘威라고도 한다

3 면의 바다는 아무르만, 뾰뜨르 대제만, 우수리만 이다.

 

'ㄱ' 모양의 항만은 뿔처럼 생겼다고 하여 금각만 金角灣이라 한다.

그럼 이다리는 금각교인가?

 

블라디보스톡에서 가장 높은  지점 '독수리 전망대'에서 기념 인증

 

독수리 전망대의 러시아 알파벳인 키릴문자를 만들었다는 키릴형제 동상의 뒷 모습.

 

연해주는 말갈, 발해의 영토였으며 1860년 아편전쟁후 베이징조약에 의해서

우수리강 동쪽의 연해지방을 러시아에 양도하였다.

블라디보스톡 금각만 연안의 아름다운 시가지 모습.

 

러시아 연해주는 압록강 건너편의 서간도, 두만강 건너편의 북간도와 더불어 국내와 접한

국경지역이고 과거 고구려, 발해 영토였다는 역사적 연고권 의식을 갖고 있었다.

1863년 지신허 마을에 13 가구가 이주한 이후 겨울에 아무르강이 얼면 많은 한인들이

건너와 1874년 첫 한인마을 '개척리' 마을이 형성되었다. 

 

1911년 5월 콜레라 예방을 이유로 신한촌은 '구개척리' 마을이 폐쇄돼어 새로운 '신개척리'마을로 옮겨진다.

신한촌은 1905년 을사늑약체결 이후 국치를 전후해 신채호, 장지연, 이강, 홍범도, 유인석 등 국내외 저명한

독립운동가의 활동무대였다. 해외민족문제연구소는 3.1 독립선언 80주년을 맞이한 1999년 8월 15일에 기념탑을 세웠다.

 

블라디보스톡 항구

 

2012년 9월, 24차  Apec 회의때 개통한 바다를 관통하는 3.5 Km길이의 사장교

 

블라디보스톡 기차역.

 

1891년 니콜라이 2세 황제가 시작하여

1903년에 완전 개통된 시베리아 철도의 시발/종점역이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유정'의 배경이 되기도하는 바이칼 호수까지의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한 여행은 한번 하고도 싶다.

 

시베리아 횡단 거리는 9,288 Km, 6박 7일이 소요된다.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기차가 막 출발을 하고있다.

 

100년 전에는 시베리아 철로를 힘차게 달렸던 증기기관차가

블라디보스톡 플랫폼에 전시되어 있다.

안중근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에 동참하신 교수님과 스태프진의 기념촬영

 

러시아 정교회의 예배당밑에 1941-1945 세계2차대전에 참전한 군인을 위한

기념비가 있고 승전을 기념하는 조형물과 전사자들을 위로하는 '영원한 불꽃'이 전시돼 있다.

 

 

2차 세계대전때 잠수함 C-56 (영문명 S-56)은 당시 독일 군함 14척을 침몰시킨

유명한 구 소련 태평양 함대 잠수함이다.

현재는 전투상황들을 재현한 물품, 사진 등을 전시해놓은 박물관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니 읽을 거리가 없었다....

 

 

 

블라디보스톡 항구에서 가까운 중앙광장에는 무명 전쟁영웅의 동상이 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300년 로마노프왕조가 무너진후

1922년 소비에트 연방을 기념하기 위한 광장이다. 그래서 혁명광장이라고도 한다.

 

제 11기 안중근의사 국외독립운동 사적지 탐방에 동참한 대학생들이

역사 유적지 탐방에 대한 각오를 혁명광장에서 펼친다.

 

아무르 만 바다 연안의 해양공원

한인들이 처음으로 정착한 舊 개척리는 바닷가에서 불과 2-300 미터 거리이다.

 

 

해양공원의 해안도로를 따라 오늘 첫날 숙박할 블라디보스톡 호텔로 향한다.

한인들의  러시아 연해주 이주는 초기에는 함경도와 평안도의 가난한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다.

나라를 빼앗긴 1910년대에는 10만 명이 넘었고 1919년 3.1운동 무렵에는 몇십만 명으로 늘었다 한다.

 

지난날 대동공보사가 있었다는 거리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른다.

1910년 국치이후에는 많은 국내외 지사들이 신한촌에 결집하여 한인학교 설립, 신문발간,

13도의군을 창설하였으며 1919년에는 망명정부(대한국민회)를 수립하였다.

 

블라디보스톡은 1910년 전후부터 1919년 3.1운동 때까지는 한민족의 국외독립운동의 메카였다.

1920년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후에도 독립운동기지로 한몫을 했지만

1937년 수십만 한인 전부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뒤에는 한인에게는 금단의 지역이 되었다.

100년 전 지난날의 개척리 거리는 현대 건물로 모두 바뀌었다.

블라디보스톡은 소비에트 연방이 무너지고 1990년 러시아 공화국과 수교이후

우리나라와 가까운 러시아 극동 최대의 교역과 관광의 도시로 바뀌고 있다.

舊 개척리 마을에는 지금은 이름모르는 동상과 예쁜 꽃으로

관광객들의 기념 사진을 찍는 곳이다.

 

 안중근의사는 1907년 29세의 나이에  종성, 경흥을 거쳐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한다.

30세 되던 1908년 봄 대한국 義軍을 창설하여 안중근은 참모중장에 선임되어 항일의병 투쟁에 나섰다.

그해 7월 국내 진공작전을 실시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일본군 포로 석방이 의병부대가 기습받은

요인이었다는 비난을 받는 등 안중근 참모중장의 의병활동은 어려움이 많았다.

 

호텔방에서 아무르만의 낙조를 본다.

 

1909년 10월 19일 안중근의사는 연추를 떠나 블라디보스톡에 도착 후

이토 히로부미의 만주 방면 시찰 소식을 듣는다.

10월 20일 대동공보사 이강으로부터 이토의 만주 시찰을 확인하고

거사자금 100원을 이석산으로부터 강제 차용한다.

 

이상의 사실은 안중근의사의 자서전 '안응칠 역사'에 쓰여있는 내용이다.

자서전은 뤼순 감옥에 수감되어 계시던 그 해 12월 13일에 집필하기 시작하여 이듬해 1910년

순국하가 10일 전인 3월 15일에 탈고한 것으로 무려 93일 동안 집필한 것이다.

 

저물어가는 블라디보스톡 해양공원의 낭만이 있는 풍경....!!

 

 

안중근의사 사적지 탐방 첫날 블라디보스톡에서.

내일은 연해주 독립운동의 중심지 우스리스크를 방문합니다.

 

2015년  7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