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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뽀빠이와 낙타의 신화 이야기

pebblebeach 2010. 12. 17. 11:39

 

 

 뽀빠이와 낙타의의 신화 이야기

 

'뽀빠이'라고 하면 시금치를 생각한다. 그 만화를 모르는 사람들도 시금치에는 철분이 많아 아이들 건강에 좋다고 믿는다. 하지만 시금치에는 다른 식품들보다 철분이 적으면 적었지 결코 많지 않다. 발터 크레머와 괴츠 트렌클러는 그들의 '상식의 오류사전'에서 '뽀빠이가 철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통조림 시금치보다 차라리 그 깡통을 먹는 것이 더 나았을 것'이라고 비웃는다. 그들의 설명을 들어보면 뽀빠이 신화는 순전히 타이핑을 잘못 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으로 식품의 성분분석을 할 때 실수로 소수점 자리가 한 자리 위로 잘못 찍히는 바람에 시금치의 철분 함유량이 10배로 불어나게 된 것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이 실수 하나로 미국의 시금치 생산자인 텍사스 크리스털 시티에는 '씩씩한 뱃사람 뽀빠이 덕분에 미국의 시금치 소비량이 33%나 증가했다'란 기념비가 세워졌고, 2차대전 후 독일에서는 수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에게 시금치를 먹였다.

그러나 우리를 정말 놀라게 하는 것은 시금치의 실제 철분 함유량이 100g당 2.2mg으로 계란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아니다. 그 착오가 1930년대에 밝혀져 수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뽀빠이 신화가 오늘날까지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 있다는 점이다. 시금치를 과도하게 먹으면 근육이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신장에 결석증이 생긴다는 의학적 진실 앞에서도 뽀빠이 신화는 꺾이지 않고 세계를 제압한다.

낙타는 성경 속에서 운다

만화가 성경으로 옮겨오고 점 하나가 문자 하나로 바뀌게 되면, 이번에는 낙타의 신화가 등장한다. 마태복음 19장 24절과 마가복음 10장 25절을 펼쳐보라.

거기에는 분명히 '약대(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I say unto you, It is easier for a camel to go through the eye of a needle, than for a rich man to enter into the kingdom of God)라고 되어 있을 것이다. 부자가 천국으로 들어가려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서커스단에 소속된 것도 아닌 낙타가 무엇 때문에 바늘귀로 들어가야 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도 이 성경 구절만큼 사람들을 매료시키고 그토록 많이 입에 오르내리는 것도 드물 것이다. 더구나 많은 연구가들이 이 성경 말씀이 오역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지적하는데도 말이다.

원전대로 하자면 그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라는 것이다. 아랍어로 밧줄은 'gamta'고 낙타는 'gamla'다. 'T'와 'L'의 글자 한 자 차이로 밧줄은 낙타가 될 수도 있고, 낙타는 밧줄로 변할 수 있다. 결국 그 한 자 차이의 잘못으로 '부자가 하늘나라로 들어가기보다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니라'라는 말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으로 오역된 것이다.

과연 그렇다. 낙타를 밧줄로 돌려놓으면 그 비유는 자연스럽게 들리고, 그 논리는 비로소 합리성을 띤다.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은 실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바늘귀와 실의 관계에 대비되는 것은 낙타가 아니라 밧줄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바늘귀의 크기에 대응하는 실과 밧줄의 차이가 생겨나게 된다.

 

신화적 사고와 허구의 세계

그것이 오타요, 오역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뒤에도 여전히 뽀빠이는 시금치를 먹고 괴력을 발휘한다. 그리고 사막을 건너야 할 낙타는 2,000년 동안이나 바늘귀 앞에서 점프를 계속한다. 사실과 과학이 지배하는 사고의 세계에서는 벌써 폐품이 되었어야 할 시금치 통조림과 낙타의 곡예가 어째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흔들고 흥분시키고 현실 이상의 힘으로 우리 앞에 군림하는가. 정말 놀라운 힘으로 뽀빠이가 거인 블루투스를 때려눕히고, 가난한 자가 부자의 부러움을 사는 허구의 그 힘은 대체 어디에서 오고 있는 것일까.

만약 사실에 입각하여 뽀빠이가 먹는 시금치를 홍삼이나 비타민제로 바꾸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리고 낙타를 원전대로 정확하게 밧줄이라고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아이들은 금세 만화책을 덮고 뽀빠이의 곁을 떠나게 될 것이고, 밧줄이 바늘귀로 들어가는 대목에서 목사님의 설교는 갑자기 그 빛을 잃게 될 것이다. 오히려 사실과 논리에서 일탈한 초현실적인 비합리성의 엇박자의 힘이 있기 때문에 그 이미지와 상징성은 강렬한 감마선을 띠게 된다. 만화나 신화의 공간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힘은 사실이나 논리가 아니다. 시금치가 갑자기 불로초 같은 환상의 빛을 발하고 사막을 건너는 대상들의 낙타가 바늘귀 만한 천국의 문 앞에서 금빛 머리를 치켜세우고 우는 그 충격은 우연과 허구의 세계에서만 가능해진다.

마르크스가 그 수수께끼와 씨름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로 하자. '그리스 신화가 그리스 예술의 병기창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예술이 움터나온 기반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스인들의 상상력과 예술을 형성했던 그러한 자연관과 사회관계가 자동기계·철도·기관차의 시대에도 가능할까. 로버츠 앤드 코(Roberts&Co) 회사에 대항하는 발칸(Vulcan)은 어디에서 등장할까. 피뢰침에 대항하는 주피터(Jupiter), 크레디 모빌리에(Credit Mobilier)은행에 대항하는 헤르메스(Hermes)는? 모든 신화는 상상 속에서 상상을 통하여 자연의 힘을 형상화하고 지배하고 통솔한다. …아킬레스(Achilles)가 납으로 만든 총알과 공존할 수 있을까. 또는 일리아드(Iliad)가 인쇄기 시대에  한 줄이라도 어울릴 수 있을까. 인쇄기가 등장하면서 그 모든 노래와 읊조림과 명상은 서사시의 전제조건들과 더불어 결국 사라져 버리지 않을까.

그리스 예술과 서사시가 사회적 발전의 한 형태에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설명하기 힘든 것은 오히려 왜 그것들이 아직도 우리에게 미적 즐거움의 원천이 되고, 또 어떤 관점에서는 우리가 성취할 수 없는 표준이자 모델로 자리잡고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은 간단하다. 우선 마르크스의 ○ ×문제에 대해 우리는 질문자의 예상과 달리 모두 ○표를 치면 되고, 마지막 주관식 질문에 대해서는 뽀빠이와 바늘귀로 쉽게 들어간 낙타의 신화를 참고로 그 답안을 쓰면 된다. 전기를 실험하기 위해 벤자민 프랭클린이 날린 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아이들도 한편에서는 그들의 아득한 옛날 할아버지네들이 그랬던 것처럼 제우스 같은 뇌신(雷神)을 향해 경이의 눈을 뜬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어른들이 그의 유년시절을 그립게 생각하는 것은 감상 때문이 아니라 그러한 신화들은 사실과 현실이라는 이름 밑에 깔린 상상과 상징의 생동하는 삶의 역동성을 일깨우는 자명종 같은 울림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특성을 3F로 정리한 것 가운데 어째서 허구를 뜻하는'Fiction'의 'F'가 끼이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보면 마르크스가 대답하지 못한 많은 현상들이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기계론적 세계관이 양자물리학에 의해 무너졌든(대니얼 벨, The Winding Pssage 참조) 과학의 세계마저 필연적이고 선형적인 인과법칙으로만 설명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적인 큰 발명조차 실수나 우연에서 창조된 '세렌디피티'(Serendipity)를 중시한다. 20세기가 단선적인 결정론으로 도구를 만들고, 그것이 세계를 지배하는 호마파베르(Homo Faber)의 시대였다면 21세기는 놀이와 상상 그리고 창조적 힘으로 끝없이 삶을 허구와 이미지로 충만하게 하는 인간-호모 픽토르(Homo Pictor)의 세기라고 할 수 있다.

꿈꾸는 인간-미치광이와 연인과 시인들

소수점이 한자리 잘못 쳐지고 글자 한 자를 바꿔 읽는 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없었던 허구의 세계가 창조된다. 그러한 사실들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사람들이 바로 세익스피어가 정의한 꿈꾸는 인간- 미치광이와 연인과 시인들이다. 3F시대에는 허구적 발상이 중요한 몫을 차지하게 된다는 것은 예술의 공간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적 공간에서 매일 사용하는 3M의 메모지 '포스트 잇'이나 음악팬들을 열광시킨 소니의 '워크맨'을 보면 안다.

풀은 무엇인가를 붙이는 접착력이 생명이다. 붙지 않는 풀은 이미 풀이 아니다. 그러나 약품을 잘못 혼합하여 붙었다가도 떨어지는 불량 풀이 만들어졌을 때 3M같은 메모지용 풀이 발명된 것이다. 떨어지는 풀의 약점과 역기능을 창조적으로 살리면 종래의 접착제와 전혀 다른 신상품이 태어난다. 붙일 수도 뗄 수도 있는 융통성 있는 새로운 풀의 발상은 풀이라는 개념 자체를 바꿔 놓았으며, 붙다/떨어지다의 정반대 되는 대립항의 경계와 그 체계를 파괴한다.

풀이 붙는 것처럼 녹음기는 소리를 기록하는 작용을 한다. 그런데 공장장이 우연히 한 공원이 녹음기에서 녹음장치를 떼어내고 대신 재생장치를 첨가하여 스트레오 음악을 즐기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다. 녹음이 안 되는 이 녹음기, 말하자면 녹음기를 재생기로 패러다임을 바꾼 그 발상에서 소니는 세계 최초로 워크맨을 개발하게 된다.

붙지 않는 풀, 녹음이 안 되는 녹음기- 그것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성경 구절처럼 오역이 창조로 변하고, 잘못 찍힌 소수점이 블루투스를 때려눕히는 뽀빠이의 놀라운 힘이 되는 기적의 파편들이다.

달리나 뒤샹과 같은 초현실주의 화가처럼 혹은 신문지의 글자들을 주어 모아 시를 쓴 미래파 시인들처럼 우연을 잡아라. 그리고 허구의 F를 향해 낚싯줄을 던져라. 시인처럼 연인처럼 혹은 광기 어린 사람처럼 일상성에서 탈출하는 탈영병이 되어라. 그 행복한 우연의 오타와 오역 속에서 당신은 때때로 바늘귀를 향해 뛰어 오르는 낙타의 놀라운 천국을 볼 것이다.

 

출처 : 월간중앙 [이어령의 생각바꾸기]

 

                                          

 

출처 : hanilob
글쓴이 : 이준황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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