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윤기 동문을 추모하는 글입니다.
경맥문학회 문학지 창간호에 실립니다.
이윤기, 신화의 강을 건너가다
김장호(시인)
작가 이윤기(49회) 동문이 홀연히 떠나갔습니다. 우리 시대의 문사(文士)인 그는‘그리스 로마 신화’를 남기고 지난 8월 27일 심장병으로 별세했습니다.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하지만 참 아까운 나이에요. 필자는 경맥문학회의 부탁으로 이윤기 동문 인터뷰를 준비하던 차에 느닷없는 비보를 들었습니다. 아, 고인의 인터뷰 글 대신 추모의 글을 쓰게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그의 부음을 듣고 지인들은 비통한 마음을 금치 못했습니다. 이튿날 저녁, 이윤기가 건너는 강가에 그를 좋아하던 사람들이 모여서 영결식을 가졌습니다. 소설가 이윤기를 좋아하던 사람, 번역가 이윤기를 좋아하던 사람, 신화연구가 이윤기를 좋아하던 사람, 이윤기의 노래를 좋아하던 사람, 이윤기와 함께 술을 좋아하던 사람, 다같이 두손 모아 그를 떠나보냈습니다.
이윤기는 탁월한 이야기꾼이었습니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상상력과 예술혼을 일깨운 사람이었습니다. 소설가·번역가·신화연구가로 활약한 그는 해박한 인문학 지식에 여러 언어에도 능통했지요. 그는 번역을 통해 신화를 만나고, 신화를 통해 창작을 했습니다. 그런 과정은 한 개인에게 있어 인문학적 상상력이 어떻게 확산되고 순환하는지 잘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최고의 번역가로 뽑힌 그는 번역을 “문학의 장르 중에서 ‘가장’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고도로 정치(精緻)한 예술행위”라고 말했지요.
그는 새천년을 앞두고 주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말만 요란했던 신세대문학의 와중에 정통소설의 바통을 이어갑니다. 그는 온갖 신화와 전설을 이야기 형식으로 재탄생 시켰습니다. 새천년 이 땅에 신화 열풍을 불러일으키며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요. 그에게 최고의 명성을 안겨준《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시리즈는 초대형 베스트셀러(200만부)로 장안의 지가를 높였습니다. 초등생까지 그 어려운 서양 신들의 이름을 줄줄 외게 만들었죠.
이윤기는 왜 그리스 로마 신화에 힘을 쏟았을까요? 우리의 신화가 인간 이상의 절대자를 노래하고 있다면, 그리스 로마 신화는 인간관계를 신을 빌어 노래하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무수한 신들이 연출하는 드라마는 뒷날 인간 세상에서 그대로 되풀이되지요. 신화를 아는 일은 인간을 미리 아는 일입니다. 신화가 인간 이해의 열쇠가 되는 것은 이 때문이죠.
“시작 없이, 모험 없이 손에 들어오는 ‘금양모피(金羊毛皮)’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가 넘어야 하는 산은 험악할 수 있고, 우리가 건너야 하는 강은 물살이 거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건너야 하는 바다도 늘 잔잔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명심하자. 잔잔한 바다는 결코 튼튼한 뱃사람을 길러내지 못해요. 신화적인 영웅들의 어깨에 무동을 타면 우리는 더 멀리 볼 수 있어요. 내가 신화를 쓰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윤기는 새천년과 함께 이 땅의 젊은이가 읽어야할 독서의 많은 분량을 책임져 주었지요. 그가 아니었으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그렇게 재밌게 읽지 못했을 겁니다. 그의 번역이 아니었다면 번역이 난해한 움베르트 에코의 작품은 아예 읽을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에코의《장미의 이름》《푸코의 진자》, 니코스 카잔스키의《그리스인 조르바》등 빼어난 작품들은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가 번역한《장미의 이름》을 교재로 활용하는 대학원도 있다지요.
이윤기는 한국 번역문학에 한 획을 그었습니다. 그는 번역문학의 눈부신 유산을 남겼습니다. 더구나 모국어를 소홀히 취급하는 황량한 디지털 사막문화의 한복판에서 이루 성취라 더욱 값지다고 할 수 있지요. 그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넘어 우리 신화에 대한 천착으로 이어지길 원했습니다. 나아가 동북아신화 재발견까지 꿈꾸었던 거죠. 그 꿈이 그만 좌절돼 안타까울 따름이에요. 하지만 미완의 신화를 고인의 외딸 다혜(30) 씨가 이어가니 얼마나 다행스러운지요. 맹장 밑에 약졸 없다지요.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에서 철학을 공부한 딸은 아버지처럼 번역가로 맹활약하고 있습니다. 그가 있어 이윤기의 유작(소설 에세이 등)이 지금 빛을 보고 있습니다.
이윤기는 타고난 글꾼이었습니다. 지금 그의 신화와 번역은 상대적으로 높은 평가와 인지도를 갖습니다. 하지만 ‘소설가 이윤기’에 대한 대접은 소홀한 것 같아요. 경북 군위에서 태어난 이윤기는 1977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하얀 헬리콥터》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지금껏 200여 권의 저서를 남겼습니다. 굵직한 상도 더러 받았지요. 1998년 중편소설 《숨은 그림 찾기 1》로 동인문학상, 2000년 소설집 《두멀머리》로 대산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뒷얘기지만《숨은 그림 찾기》는 경북중 은사인 이형세 역사 선생님을 생각하며 집필하였다고 합니다. 또 장편 《하늘의 문》은 우리말로 된 세련된 문장이 매우 돋보입니다. 근현대문학을 통틀어 그렇다고 평론가 조우석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비록 대중적인 기반을 확보하지 못했지만 소설가 지망생의 필독서로 꼽히고 있다지요. 그의 산문집은 또 어떻고요. 그의 글은 호흡이 짧으면서도 부드럽고 위트와 재미와 유익함과 통쾌함이 있습니다. 인생을 보는 깊은 눈과 넉넉한 여유와 상쾌한 반전이 있습니다.
이윤기는 언제나 겸손했습니다. 얄팍한 글재주를 뽐내며 거드름을 피우는 문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몸을 곧추세우는 권위와 틀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목소리 높이기보다 그저 겸허한 ‘메신저’로 술 좋아하고 노래 부르기를 즐겼습니다. 경북중 시절부터 절친했던 양윤기 동문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도서관에서 일본 소설을 읽을 정도로 문학에 빠졌습니다. 1975년부터 원서를 번역하느라 명동 중국대사관 골목을 들락거렸어요. 이따금 술 한 잔 하자고 말하면 ‘그래, 그냥 집에 가면 소주한테 미안해서 안 되지’하며 씩 웃어주었지요. 그는 베트남 참전용사로 잠시 나팔수로 있었습니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웬만한 클래식 음악은 휘파람으로 불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술자리에서는 옛 가요를 구수하게 곧잘 불렀어요. 영결식에서 노래꾼 장사익이 이윤기의 생전 애창곡 ‘봄날은 간다’를 부를 때에는 제 코 끝이 다 찡해지더이다.”
그렇습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유행가의 노랫말이 더 시다울 때 있습니다. 이 땅의 문인들도 백설희가 부른‘봄날은 간다’를 가장 좋아하고 흥얼거리지 않는가요. “…꽃이 피면 같이 웃고/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봄날은 간다.”
이제 이윤기는 신화의 강을 건너갔습니다. ‘조르바’처럼 자유로운 영혼의 삶을 살다 떠나갔습니다. 그의 봄날은 갔지만 그의 신화는 오래오래 잊혀지지 않겠지요. 고인의 집필실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향소리에 있습니다. 그는 생전에 몸소 가꾸었던 그곳 마당 한켠 꽃밭에 잠들어 있지요. 훗날 고인을 만나면 그의 애창곡 ‘봄날은 간다’를 꼭 청해 들어볼 참입니다.
다시 한 번 고인의 명복을 두손 모아 빕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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