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은 신도읍의 새 궁궐로 태조 4년 1395년에 창건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때 전소하였으며
273년간 폐허상태로 방치되었으나 고종 2년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는 등 많은 전각이 훼손되었으나 1990년대부터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복원 사업을 벌인 덕분에 일부를 제외하고는 많은 전각이 복원되었다.
50여년 전 경복궁을 처음구경 왔을때 경회루밖에 기억이 없는데 이번에는
미술사적으로 아름다운 아미산 굴뚝, 만추의 아름다운 향원정, 치욕의 역사가 있는 건청궁 등 을
구경하고 우리 근대사를 돌아보는 역사의 시간이 되었다.
흥례문은 1997년에 복원되었다.
근정문 (보물 제812호)
근정전 (국보 제 223호)은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건물
앞마당의 자연박석과 품계석
근정전 앞마당의 깔린 박석조각과 구름차일 칠때 사용했든 쇠고리.
초등학생이 숙제를 하면서 내게 용도를 물어와 내가 갖고있든 안내책자를 보고 의미를 가르켜 주었다.
근정전 어좌와 일월오악도
해와 달, 다섯의 산봉우리 (해설자는 백두산, 묘향산, 금강산, 지리산, 한라산 이라 하는데?)
폭포와 잘 생긴 소나무, 파도치는 대해.
근정전 내부는 2 층이 아닌 상하가 하나로 된 통층이다.
천정에는 왕을 상징하는 용이 그려져 있다.
근정전 뒤는 임금님이 늘 머물며 정치하는 경복궁의 편전이다.
근정전 행각
편전의 명칭을 사정으로 정한 사람은 삼봉 정도전이다.
사정전은 한자로 思政殿 - 임금은 정치를 깊이 생각하라는 뜻이다.
사정전 서쪽의 천추전은 가을과 겨울에 사용한 편전.
난방시설이 잘 되어 있는 모양이지요.
사정전 동편의 만춘전은 봄에 사용한 편전.
6.25때 불에 탔었고 최근에 복원되었다.
50여년 전 경복궁 수학여행때의 기억에 남는 유일한 건물 경회루이다.
경복궁 건축의 꽃이라 불리는 경회루 (국보 제 224호)는 외국 사신 접대와 궁중 연회 공간으로 쓰였다.
고종 4년 1867년 에 복원 되었으며 태종 때 창건한 경회루는 임란때 누각이 불타고 돌기둥만이 폐허로 남아 있었다.
경회루와 내전 사이의 돌담길. 비슷한 돌담길이 많아 迷宮의 어원이 되기도 한다.
사정전 바로 뒤의 내전이 시작되고 첫머리에 임금님의 침소인 강녕전이 있다.
강녕전은 왕이 편안되고 안녕되기를 바란다는 마음에서 강녕전이란 이름을 봍였다.
강녕전 건물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이 용을 상징하기 때문에 용마루를 언지 않았다고 한다.
강년전 뒤에 있는 교태전으로 들어가는 솟을 대문인 양의문.
양의문 양쪽에는 앞건물인 강녕전의 굴뚝이 수문장인 양 우뚝 솟아있다.
교태전의 굴뚝이 아니다.
강녕전 바로 북방에 위치하는 중궁전인 교태전
강녕전같이 용마루가 없는 침전 구조
교태전 서쪽에 위치하며 세종 때 불상을 모셔두고 불교의식과 행사를 열었던 함원전
일제강점기에 이건되었다가 1995년 제자리에 중건되었다.
아미산은 태종이 경회루를 창건하고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 교태전 뒤뜰에 만든 인조동산으로
네개의 꽃계단으로 축조하였으며 교태전 굴뚝 네 개가 서있다. 보믈 제 811호
6각형 기둥의 굴뚝에는 아름답고 상서로운 무뉘들이 별도의 전돌로 붙여있다.
건승각은 교태전 옆 건물로 왕비가 출산을 하는곳으로 무사 출산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있다.
경복궁에서 가장 호사스럽게 단장한 교태전, 자경전 일대의 꽃담.
자경전 서편 바깥벽을 장식한 화문담 (고급스럽게 전문 기술인이 축조한 담장).
자경전 합각에도 아름다움이 넘쳐흐르는 무뉘가 있다.
자경전은 고종의 즉위에 기여한 24대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 조씨를 위하여
흥선대원군이 지어준 호화스러운 거처로 보물 제 809호다.
자경전 십장생 굴뚝 : 보물 제 810호
자경전 굴뚝은 뒤뜰에 별채인 양 따로 뛰어내서 축조를 했다.
아름다운 십장생 벽화를 장식했다.
향원정은 궁 속의 궁인 건천궁의 앞정원으로 왕과 왕비의 사적 공간이다.
향원이란 '香遠益淸'에서 따온 것으로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라는 뜻이다.
다리는 본래 건청궁 대문 쪽에서 가로질러있었으며 醉香橋라 불렀다.
지금 다리는 한국전쟁 때 임시로 놓은것이다.
창덕궁의 부용정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연못으로 꼽힌다.
고종 10년 (1873년)에 고종은 편안한 살림집 구조의 아담한 집을 지었다. 건청궁이다.
아버지 대원군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고 인간적으로 편안한 거소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건청궁은 고종이 기거했던사랑채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기거했던 안채 곤녕합으로 나뉜다.
건청궁으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곤녕함으로 들어가는 함광문이 있다.
고종 32년 (1895년)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했다.
황후의 시신은 옥호루에 잠시 안치되었다가 건청궁의 뒷산인 녹산에서 불태워졌다.
건청궁의 역사는 입구의 안내석에 한글과 영문으로 쓰여있지만 일본 자객이 황후를 살해하는
만행을 좀더 상세하게 일본어와 중국어로 써서 곤녕합과 옥호루앞에 붙어 있으면
일본인 관광객들에게 부끄러움을 느께게 해 줄 수 있을텐데 아쉽다.
시해 다음해인 1896년 고종은 아관파천하고 일제는 주인 잃은 건청궁을 헐어
1909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어 자신들의 범행 자취를 없애려 하였다.
건청궁이 완공된 것은 고종 10년(1873)이었지만 3년 뒤인 1876년 강년전 등 내전 일대에
큰 화재가 일어나 왕의 거소를 창덕궁으로 옮겼다가 다시 건청궁으로 돌아온 것은 고종 22년 (1885)이고
이때부터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고종 32년 (1895)까지는 건청궁에 머물렀다.
집옥재는 고종이 창덕궁에 있을때인 고종의 서재로 1881년에 지은것으로 중국풍이 완연하다.
집옥재 동편 복도로 연결되는 협길당은 궁내의 보통 전각 모습이다.
집옥재를 둘러보고 서북쪽에서 단풍이 붉게 물들어가는 만추의 향원정을 다시본다.
경복궁은 자연과의 조화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북악산, 인왕산은 세계 어느 나라 왕궁에서도 볼 수 없는 경복궁의 가시적 정원이다.
근정전에서 남쪽으로 바라다본 위치에 정문인 근정문이 있다.
많은 내외 관광객이 조선조로 부터 오늘까지 600년의 수도 서울을 관광하고 있다.
조선왕조 개국 이래 광화문은 수많은 수난을 겪었지만 서울의 얼굴이고 상징이다.
복원된 광화문과 광화문 광장
광화문 너머 인왕산과 북악산이 보인다.
만추에 경복궁을 구경하면서
2014년 10월 23일
Autumn Leaves - Linda Gentille
'Korea'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4.11.8. 메이풀이 아름다운 만추의 오크벨리 (0) | 2014.11.10 |
---|---|
2014.10.28. 축령백림을 거쳐 서리산을 등반하였습니다 (0) | 2014.11.04 |
2014.10.19. 북한산 대성문, 대남문과 부왕사 계곡도 만홍입니다. (0) | 2014.10.21 |
2014.10.15. 청계산에도 오색 단풍이 물들고 있습니다. (0) | 2014.10.16 |
2014. 9.20. 남양주의 백봉산 - 묘적사 하이킹 9.5 Km (0) | 2014.09.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