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시는 억세게 운이 없다고 해야지요
B-29에 실린 원폭은 원래 규슈 제일의 공업 도시 고꾸라(小倉, 지금의 北九州市)에
투하될 예정이었지만 고꾸라의 기상 악화로 폭격이 불가능해지자 투하 예정지를
2차 목표인 나가사키로 급 변경하였다 한다. 원폭과의 악연인가 ..??!!
규슈 여행 4일째
오늘 오전은 나가사키의 원폭 피폭지와 평화공원을 둘러보고 오후는 야마구치현의
야마구치시와 하기시를 관광할 예정이다. 아침은 서둘러 St. Paul호텔의 호텔 부페 조식으로
마치고 평화공원내의 원폭 낙하 중심지 등을 둘러본다.
국립 長崎 원폭 死沒者 추도 평화기념관.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는 무고한 시민 15만 명이 죽고 다쳤으며 한국인 피해자도
1만 명이 사망한것으로 알려져 있으니 死沒者라는 단어는 적절한 표현인 것 같다.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은 원폭 투하 당시의 참상을 사진과 자료로 보여주고 있다.
자료관 입구의 멈춘 벽시계가 원폭 투하시점 1945.8.9. 11:02 분을 가르킨다.
약간 높은 지대에 위치한 원폭사몰자 추도평화 기념관과 원폭자료관을 나와서
평화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평화를 염원하는 많은 동상, 기념물이 서 있다.
피폭 후 2개월 후 10월에 촬영한 폭심지 일대는 허허벌판으로 바뀐 모습을 보여준다.
피폭 당시 사진의 하단의 개천은 오늘날 이렇게 정비되어 있다.
이 개천을 건너 평화 공원으로 들어간다.
1945. 8. 9. 11:02을 표시한 평화를 기원하는 소녀 동상.
원폭 낙하 중심지에 검은색 화강암으로 중심비를 세워 놓았다.
원폭이 폭발한 곳은 중심비가 서 있는 곳에서 공중 500m 지점이며 이와 동시에 반경 2.5KM
일대가 폭풍과 열선, 방사선으로 폐허가 된다. 당시 나가사키의 인구가 24만 명으로
원폭 사망자는 73,8884명, 부상 74,909명으로 집계되었다.
1945년 10월에 촬영된 것으로 원폭 투하 이후 처음으로 이곳에 세워진
원폭 낙하 중심지를 표시하는 푯대.
1587년 천주교 금지령 이후 긴 박해의 역사를 견더내어 1873년 천주교 해금후
신자들은 1914년에 우라카미 성당을 완성하며 1925년에는 2개의 철탑을 완성하여
동양에서 제일 가는 장대함을 자랑하던 성당이었으나 원폭 낙하 중심지
바로 옆이었기에 측벽만 남기고 잿더미가 되었다.
처참함 모습으로 서 있는 우라카미 성당의 유벽.
피폭당시의 비참한 실상을 나타내는 매몰된 파괴된 기와와
벽돌, 타버린 흙 등을 통해 당시의 참상을 알 수 있다.
피폭 사망자가 갈증의 고통으로 죽었기 때문에 그 영혼을 위로하는
평화의 샘과 분수.
피폭으로 사라진 나가사키 형무소의 옛부지.
원폭 투하 당시 이 형무소에는 직원과 수인 134명이 있었는데
조선인 수용자 13명을 포함해서 전원이 사망한다.
원폭 투하 지점에서 100-350M 지점으로 폭심지에서 가장 가까운 공공건물였다.
피폭 10주년을 기념해 1955년에 세운 평화기념상.
오른팔은 원폭의 위협, 왼팔은 평화를 상징, 두 눈은 희생자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가볍게 감고 있다 (長崎 관광 설명서)
1959년에 옛 모습과 똑 같이 재건된 우라카미 (浦上) 천주당
붉은 벽돌의 성당이 무척 아름답다.
원폭의 폭풍속에서도 견디어 낸 우라카미 성당의 안젤루스 종은 원폭 희생자의
명복을 빌고 다시는 그런 불행이 없도록 지금도 하루 세번 울린다고 한다.
후구오카에서 나가사키는 가라쓰, 히젠나고야, 이마리, 우레시노 온천과
아리타를 거쳐오면서 짧은 구간 고속도로를 이용했지만 대부분 좁은 국도를 달려왔다.
나가사키에서 야마구치는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299 kM, 3시간 40분이 걸린다.
오늘부터 친구 A가 우측 핸들에 도전하고 나는 네비를 읽고 운전을 보좌하는 조수가 된다.
신나게 일본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친구 A군. 덕분에 나는 엄청 편해졌다.ㅎㅎ
나가사카 출발 125 Km지점의 基山 휴게소에서 점심을 먹는다.
휴게소라지만 자동 판매기에서 우동 (혹은 김밥 세트) 식권을 사서 주문한다.
또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 먹는 정도로 우리의 고속 휴계소와는 비교가 안된다.
우리같은 덕평 소고기 국밥이나 안동 간고등어 같은 특식은 물론 없다.
우동을 한그릇씩 먹었지만 둘 다 매우 지친 모양새다.....
집 떠나면 고생을 실감....그래도 여행은 즐거워.... ㅎㅎㅎ
시모노세끼 (下關)와 모지 (門司)를 연결하는 칸몬대교를 지난다.
대형 현수교, 길이가 1,068 미터라고 한다. 시모노세끼를 향하면서 찍은 사진.
아래 사진은 다음날 (7/8일) 후쿠오카로 돌아올때 칸몬대교를 건너는 사진이다.
돌아오는 날은 이번 여행중 처음 비가 내렸다.
야마구치시는 우리가 동해 쪽에 있는 역사적인 도시 하기(萩)시를 방문하기
위하여 거쳐가는 도시지만 친구 K는 야마구치시를 대표하는 관광 명소로
류리광사 오층탑 -루리코지 고주노토 (瑠璃光寺 五重塔)를 꼭 가봐야 한다고 추천한다.
류리광사는 오우치 (大內)씨의 전성기 문화를 전승하는 사원으로 오층탑 외에도
벚꽃과 매화가 아름다운 고잔공원(香山公園),
국가지정사적지 고잔보쇼(香山墓所), 진류데이. 로잔도 등이 있다.
향산묘소 입구
향산 묘소는 하기의 번주 (毛利本家)의 묘소로 높이 18m, 폭 58m의 원형 묘로
전면에 기석이 있으며 근세 묘소의 대표적이라고 설명에 쓰여 있지만
나는 이런 봉분 묘는 일본에서 처음본다. (봉분위에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메이지 유신때 지사 회합의 장소
진류이데이 2층에는 메이지 유신 3걸이라는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의 사진이 걸려있다.
오우치 가문은 중세에 걸쳐 주고쿠 (中國)지방의 서부를 장악한 가문으로
오우치 히로세(大內弘世)공은 오우치 24대 당주로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으로
교토를 닮은 山口 분지에 옮겨 살면서 오늘날의 야마구치 町가 탄생한다.
히로세는 문무 겸비한 명장으로 1380년에 졸한다.
<일본역사대사전>에 의하면 오우치 가문은 백제국 성명왕 (聖明王 : 聖王)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 (琳聖太子 린쇼태자)의 후손으로 설명되어 있다고 한다.
류리광사에서 일하는 인부에게 기마 동상이 누군냐고 물었더니 반도에서 온 도래인
이라고 똑같이 설명한다. 나야 역사학자는 아니지만 펵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오우치 가문의 25대손 오우치 요시히로 (大內義弘)는 현재의 장소에 고샤쿠지 (香積寺)를
창건하며 (나중에 하기로 옮김) 1399년 요시히로가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에 의해 자결하자
동생 요시히다가 형의 죽음을 애도하여 만든것이 5층 목탑이라고 한다.
류리광사의 보령산 (일주문에 해당하는걸까??)
오중 목탑을 흉내넨 5층 석탑.
드디어 오중탑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중탑 방문 인증도 남겨야지요...!!
루리코즈의 오층탑은 높이 31.2m이며 지붕은 노송나무 껍질로 이어진 것으로 2층에만 난간이
설치되어 있고 위층으로 갈수록 가늘어지는 아름다운 형태의 탑이다.
일본의 3대 명탑 (교토의 다이고지- 醍醐寺 제호사. 나라의 호류지 - 法隆寺의 오층탑)의
하나로 무로마치 시대 중기의 뛰어난 건축믈로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일본의 국민작가 司馬遼太郞가 쓴 역사기행문 <길을 가다>에서
오중탑의 찬미가.
오오치 요시타카 (大內義隆 1507 ~ 1551)는 오우치 가문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인물로 戰국시대 大名 다이묘다
야마구치현 (山口縣)은 근대 일본의 많은 인물을 탄생시킨 곳이다.
1868년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이 된 삿쵸도히 (薩長土肥)의 핵심이 야마구치현이다.
삿쵸도히란 가고시마현, 야마구치현, 고치현, 사가현을 부르는 말로 에도 막부를
종식시킨 주역들의 출신지역을 말한다. 안중근의사가 하얼빈에서 격살한 우리에게
영원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포함해서 지금의 총리 아베 신죠까지
8명의 총리가 야마구치 출신이다
야마구치의 류리광사의 오중탑과 오우치 가문 관계를 배우고
우리는 메이지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하기 (萩)시로 향한다.
하기시가 5 Km 전 지점에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이론자인
요시다 쇼인 (吉田松陰)의 기념관에 잠시 차를 멈춘다.
내일 Hagi시에서의 일정에는 요시다 쇼인의 松下村塾이 포함되어 있다
Hagi 시에 관해서는 아무런 사전 지식도 없이 왔으므로
하기시 관광안내소를 찿아가서 지도와 오늘 저녁 유숙할 호텔을 추천받는다.
온천여관이 아닌 이상 비싼 려관이 아니래도 무방하다.
객실 14개 짜리 조그마한 비지네스 호텔에 다다미방 싱글 3 개를 예약한다.
값도 싸고 깨끗한 호텔에서 아침은 우리가 주문한 토스트와 밀크, 커피를 먹었다.
저녁은 오코노미야끼를 술 안주로 맥주와 니혼슈를 마신다.
값싸고 맛있게 먹는 우리 청진동 빈대떡이나 동래파전 같은 맛이다.
친구 A는 오코노미야키 오네상 세프가 권하는데로 먹다가 배가 터진다고...ㅎㅎ
조선 왕조와 교역을 텄던 백제 성왕의 후예 오우치 가문과의 관계에 관한 글이
<일본열도에 흐르는 한국혼, 김달수 저>에 실려있다.
25대 오우치 요시히로는 1399년 조선왕 정종에게 백제 국왕이 소유했던 토지의 일부 할애를 요구했고
조선 국왕이 "요시히로는 원래 백조 시조 온조왕의 후예이다"라고 요시히로의 요구를 받아들여
조선의 국토 일부를 할양하러 했다는 내용이다 (정종실록)
야마구치 하기에서 여행 나흘째 밤을 맞이한다.
2016년 7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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